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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한국의 간디, 씨알 정신, 민주화운동가, 평화주의, 퀘이커

by jisik1spoon 2025. 5. 16.

함석헌(1901~1989)은 한국 현대사에서 독보적인 사상가이자 민주화운동가, 비폭력 평화주의자로 평가받는 인물입니다. 그의 삶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부터 군사독재 시절 민주화 투쟁에 이르기까지 한국 현대사의 격변을 고스란히 담아내며, "씨알사상"이라는 독창적인 철학을 정립했습니다. 종교인, 문필가, 교육자, 언론인으로서 다방면에서 활동한 그는 "한국의 간디"로 불리며 노벨평화상 후보로 두 차례 추천되는 등 국제적 명성을 얻었습니다.

역사적 배경과 생애

초기 생애와 학문적 기반

함석헌은 190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기독교 가정의 3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한학을 수학한 후 덕일학교와 양시공립보통학교를 거쳐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으나,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뒤 학교 측의 반성문 작성 요구를 거부하고 자퇴했습니다. 이 시기 그의 정신적 지주였던 오산학교에서는 남강 이승훈과 다석 유영모로부터 민족주의와 기독교 정신을 배웠으며, 이는 후일 그의 사상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1924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도쿄고등사범학교에서 수학하는 동안,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 연구 모임에 참여하며 종교적 깨달음을 확장시켰습니다. 이 시기 김교신·송두용 등과 함께 『성서조선』 창간에 참여하며 문필 활동을 시작했고,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집필하며 역사 인식의 틀을 마련했습니다.

투옥과 저항의 연대기

함석헌은 일제강점기 동안 총 2차례에 걸쳐 투옥되었습니다. 1940년 계우회사건으로 평양 대동경찰서에서 1년간 구금되었고, 1942년 『성서조선』 필화사건으로 서대문경찰서에서 또다시 1년간 복역했습니다. 해방 후 북한에서 신의주 학생의거 배후로 지목되어 투옥되었으나 1947년 월남하여 본격적인 남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50년대 이후에는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군사정권에 맞서며 8차례나 투옥되는 등 고난의 길을 걸었습니다. 1958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글로 자유당 정권을 비판했고, 1961년 5·16 군사정변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며 저항의 깃발을 들었습니다. 1970년 창간한 『씨알의 소리』는 군사독재에 맞선 대표적인 언론 도구로 기능하며 1980년 강제 폐간될 때까지 민중 계몽의 전위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사상적 체계: 씨알사상의 정립

씨알 개념의 철학적 토대

함석헌 사상의 핵심은 "씨알" 개념입니다. 이는 단순한 민중(民衆)을 넘어 "역사의 주체이자 창조적 생명력의 원천"을 의미합니다. 그는 『뜻으로 본 한국역사』(1967)에서 "역사는 씨알이 껍질을 깨고 올라가는 과정"이라고 규정하며, 영웅사관이나 유물사관이 아닌 민중사관을 주창했습니다. 씨알사상은 기독교의 하느님 나라 개념, 노장사상의 무위자연, 불교의 연기설을 종합적으로 융합한 독창적인 철학 체계로 평가받습니다.

비폭력 평화주의의 실천

그의 평화주의는 단순한 전쟁 반대를 넘어 "삶의 방식" 그 자체였습니다. 1962년 미국 퀘이커교도들과 교류하며 비폭력 저항의 이론적 기반을 다졌고, 1979년 YMCA 위장결혼식 사건 당시 경찰의 폭력에 맞서기도 했으나 오히려 "경찰도 우리의 씨알"이라며 이해를 호소했습니다. 이는 적을 증오하지 않는 간디의 사티아그라하 정신과 맥을 같이합니다.

종교적 신념과 실천

기독교에서 퀘이커까지

함석헌은 초기 장로교 배경에서 출발했으나, 우치무라 간조의 무교회주의 영향을 받아 제도권 종교를 비판했습니다. 1953년 퀘이커 교도로 전향한 후로는 "침묵 예배"를 통해 내면의 빛을 추구하는 방식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그러나 말년에는 특정 종교에 국한되지 않고 노자·공자·석가의 가르침을 아우르는 종교다원주의적 입장을 취했습니다.

종교시와 영성의 표현

300여 편에 이르는 그의 종교시는 철학적 사유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결과물입니다. 시집 『수평선 너머』(1953)에서 "씨알은/땅속에서 꿈틀거리는/보이지 않는 뿌리"라고 노래하며, 고난 속에서도 생명력을 잃지 않는 민중의 이미지를 형상화했습니다. 그의 시 세계는 도교의 자연관과 기독교의 구원 의식이 혼융된 독특한 미학을 보여줍니다.

사회운동과 정치적 참여

반독재 투쟁의 전선

함석헌은 1974년 민주회복국민회의 창설에 참여해 윤보선·김대중과 함께 군사정권에 맞섰습니다. 1979년 명동YMCA 사건과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에도 계엄군의 폭력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하며, "폭력은 새로운 폭력을 낳을 뿐"이라 경고했습니다. 1987년 6월 항쟁 시기에는 노태우 정권의 직선제 개헌 방안을 "반쪽짜리 민주주의"라 비판하며 완전한 민주주의 구현을 요구했습니다.

통일운동과 남북 화해

1984년 민주통일국민회의 고문으로 활동하며 "분단은 인위적 장벽"이라 규정하고 민간차원의 교류 확대를 주장했습니다. 『통일의 길』(1984)에서 그는 "통일은 씨알들이 마음의 장벽을 허무는 것에서 시작된다"며 문화적 화해를 강조했습니다. 이는 당시 남북 대립 구도를 넘어선 선구적 통일관으로 평가받습니다.

학문적 유산과 현대적 재조명

다학제적 연구의 확장

2000년대 들어 함석헌 연구는 신학·철학·역사학 분야를 넘어 생태학·평화학으로 확장되었습니다. 2002년 세계철학자대회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사상가로 소개되며 국제적 주목을 받았고, 2009년 한길사에서 전30권 『함석헌 전집』이 출간되며 사상적 체계가 본격 정리되었습니다. 2021년 탄생 120주년을 맞아 서울 마포구에는 "함석헌기념사업회"가 설립되어 그의 정신을 계승하는 프로그램을 운영 중입니다.

교육 현장에서의 적용

대전 현충원에 안장된 그의 묘소(2006년 이장)는 현장 학습 장소로 활용되며,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고등학교 통사 교과서에서 참고 도서로 지정되었습니다. 2023년 교육부는 "함석헌 평화교육 콘텐츠 개발 사업"을 추진하며 비폭력 갈등 해결법을 학교 교육에 도입하고 있습니다.

결론: 21세기 씨알 정신의 부활

함석헌은 20세기 한국이 낳은 가장 독창적인 사상가이자 실천적 지성인으로, 그의 유산은 단순한 역사적 인물을 넘어 현재진행형의 정신적 자원입니다. 기후위기와 디지털 격차, 북핵 문제 등 복합적 위기에 직면한 오늘날, 씨알사상은 "가장 약한 자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바라보라"는 통찰로 재조명받고 있습니다. 서울 도봉구 쌍문동에 건립 예정인 함석헌기념관(현재 추진 중)은 그의 정신을 공간으로 구현하며 미래 세대와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비폭력·평화주의·생명존중의 가치는 인공지능 시대에 더욱 절실한 윤리적 기준이 되며, 함석헌의 사유는 한국을 넘어 전 지구적 차원에서 새롭게 해석될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