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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휘 : 조선 말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권력과 친일 행적에 대한 종합적 고찰

by jisik1spoon 2025. 5. 27.

민영휘(閔泳徽, 1852~1935)는 조선 말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권력을 누린 인물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확정된 역사적 인물이다. 그의 생애는 정치적 기회주의, 경제적 축재, 친일 협력이라는 세 가지 축으로 요약될 수 있다. 2024년 현재까지도 그의 후손들이 소유한 토지에 대한 국가 환수 움직임이 지속되고 있으며, 이는 민영휘가 남긴 역사적 유산이 현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보여준다.

민영휘의 정치적 기반과 초기 경력

가문 배경과 관료적 출발

민영휘는 1852년 여흥 민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명성황후의 15촌 조카로, 비록 직접적인 혈통은 아니었지만 외척 세력의 일원으로서 정계에 진출할 수 있는 기반을 확보했다. 1877년 문과에 급제한 후 검열(檢閱) 직책을 시작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며, 1880년대 초반까지 주서·정언·부수찬 등을 역임하며 경력을 쌓았다.

권력의 정점과 탐관오리 행적

1891년 이조판서에 오르며 본격적으로 권력의 핵심에 진입한 민영휘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청나라 군대 개입을 주도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위안스카이(袁世凱)와의 유착 관계를 통해 정치적 입지를 강화했으나, 갑오개혁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실각하기도 했다. 그의 탐학 행위는 당대 기록에 "백성을 착취하여 오로지 자신을 살찌우는 데 여념이 없었다"는 평가로 구체화되며, 이는 1894년 전라도 임자도 유배 사건으로 이어졌다.

일제 협력과 경제적 축재 메커니즘

친일 행적의 체계적 전개

민영휘의 친일 협력은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본격화되었다. 1907년 고종 강제 양위를 주도했으며, 1910년 한일병합 직전에는 정우회(政友會) 총재로서 합방 찬성 운동을 주도했다.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 작위를 수여받은 그는 1912년 한국병합기념장, 1935년 조선총독부 표창 등을 통해 식민지 권력과의 유착 관계를 공식화했다.

부의 축적 구조

민영휘의 재산 형성 과정은 두 차원에서 분석될 수 있다. 첫째, 관직 재임 시기(1890~1905)에는 평안감사·한성부판윤 등 요직에서의 부정 축재가 주를 이뤘다. 1890년대 말 그의 연간 수입은 10만 석(현재 가치 약 50억 원)에 달했으며, 이는 당시 조선 최고 수준의 부를 의미했다. 둘째,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과의 특권적 관계를 활용한 토지 매입이 두드러졌다. 1930년대 그의 총 재산은 4,000만 원(현재 약 8,000억 원)으로 추정되며, 이는 이완용의 재산(130만 원)을 월등히 초과하는 규모였다.

현대적 쟁점: 친일재산 환수 문제

역사적 재평가의 법적 기반

2007년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민영휘의 토지 128만㎡(공시지가 57억 원)를 국가 귀속 결정했으나, 후손들의 소송으로 인해 실제 환수는 부분적으로만 이루어졌다. 2024년 11월 현재, 충북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를 중심으로 청주 상당산성 일대 21만㎡(39억 5,700만 원)와 경남 사천시 단종태실지 인근 토지에 대한 새로운 환수 신청이 진행 중이다.

재산 구조의 다층성

민영휘 재산의 특이점은 다단계 상속을 통한 분산 소유에 있다. 본인이 직접 소유한 128만㎡ 외에도 자식 명의로 등기된 7,600만㎡가 추가로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재산 관리 방식은 1930년대 후반 농지개혁을 앞두고 대부분 매각된 이근호·민병석 등의 사례와 대비되며, 민영휘 가문의 경제적 탄력성을 보여준다.

민영휘 유산의 사회적 영향

교육 기관을 통한 이미지 세탁

1906년 설립된 휘문의숙(현 휘문고등학교)은 그의 친일 행적과 대비되는 양면성을 보인다. 당시 교과서 56종을 자체 편찬하며 근대 교육에 기여한 측면과, 학교 설립 자금이 친일 협력의 대가로 얻은 자본에서 비롯되었다는 비판이 공존한다. 이는 식민지 시기 엘리트 층의 도덕적 딜레마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현대 한류 관광과의 접점

남이섬 논란에서 드러나듯, 민영휘의 후손들이 운영하는 관광지들은 역사적 부정의와 경제적 성공이라는 이중적 구조를 노정하고 있다. 2023년 기준 남이섬 연간 방문객 300만 명 중 15%가 외국인인 점은 문화 자산화 과정에서의 역사 인식 문제를 제기한다.

결론: 미완의 역사 청산

민영휘 사례는 한국 현대사가 직면한 구조적 과제를 응축적으로 보여준다. 첫째, 친일 협력과 경제적 부의 상관관계에 대한 체계적 연구가 여전히 미흡하며, 둘째, 법적 환수 절차와 시민 사회의 역할 간 괴리가 존재한다. 2024년 현재 진행 중인 시민 주도 재산 환수 운동은 단순한 토지 반환을 넘어 역사적 정의 실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이 과정에서 요구되는 것은 민영휘 개인의 행적 규명을 넘어, 식민지 권력과 결탁한 지배 엘리트 구조 전체에 대한 총체적 성찰이다.